Vivabrasil - 중남미맞춤 전문여행사 - 중남미 지역 정보 및 안내
 
 
 
 

 

4731
  일반 (5)  질문 (3)  답변 (3)  칼럼 (39) 
2006-07-01 00:40:09
http://www.vivabrasil.co.kr
김영길의 '남미 리포트' [52] 탱고의 역사를 찾아서 (하)

                                                                                        출처 : 프레시안 - www.pressian.com
                                                              
                                                                   ※필자 소개
  
                                                                    필자 김영길은 1952년생으로 1986년에 아르헨티나로 이민 갔다.
                                                                    1995년 한경비지니스 부에노스아이레스 객원기자를 거쳐 1999년
                                                                    부터 아르헨 외신기자협회 집행위원을 맡고 있다.  현지언론에
                                                                    아시아 관련 패널리스트로. 메르코 수르 통합 국제 세미나(아르
                                                                    헨티나 -브라질) 패널로도 참여했다. 또한 현지언론에 정치ㆍ경
                                                                    제관련 컬럼을 기고하고 있다.


[25] 탱고의 역사를 찾아서 (하) 2005-04-16

‘남ㆍ북미 대륙에서 흑인이 없는 유일한 나라’
  
  노예들이 세가 점점 거칠어지고 단체화 되어가는 데 불안을 느낀 아르헨 정부가 흑인노예들 처리를 어떻게 했다는 공식적인 기록은 어디에도 없었다. 다만 이에 대해 UBA(부에노스아이레스대학)역사학교수를 역임했던 마리오 까레라 박사는 “아르헨티나에 아메리카대륙에서 유일하게 흑인이 없는 건 1890년대 말 황열병이 퍼지자 정부는 보까 지역을 군인들을 동원하여 차단시키고 의약품이나 물,그리고 음식공급을 철저하게 중단시켰다. 결국 아르헨티나에 팔려왔던 모든 흑인노예들은 병으로, 혹은 굶주려 모두 멸종을 하고 극소수만이 강을 건너 우루과이 등지로 도망을 쳤다. ”고 증언했다.
  
  흑인노예들을 몰아낸 보까 항은 그 후 자연스럽게 유럽노동자들의 삶의 터전이 되었고 흑인노예들과 오랜 세월을 함께 보냈던 부두노동자들이 자연스럽게 땅고 춤과 축제를 이어가게 된 것이다. 그러다 1900년대 초 독일계이민자들이 대거 보까 항에 들어왔고 이들이 가지고 온 반도네온이라는 악기가 북 대신 땅고 춤에 도입이 되면서 땅고는 부두노동자들의 애환을 노래하고 외로움을 달래는 이민자들의 춤과 음악으로 탈바꿈을 하게 된다.
  
  1900년대 초 아르헨티나 현지에서는 노동자들의 춤과 노래라고 천대받던 땅고가 유럽으로 건너가 파리에서 호평을 받자 미국의 한 유명 영화사가 1926년 탱고를 주제로 한 영화를 제작하기에 이른다. 그 후 땅고는 신분의 차이를 넘어 상류사회의 사교춤으로 탈바꿈하는 또 한번의 변화를 하게 된 것이다.
  
  이런 슬픈 역사를 지닌 땅고가 세계적으로 알려지게 된 것은 아무래도 까를로스 가르델이라는 걸출한 스타가 있었기에 가능했을 것이다.



45세의 나이에 비행기추락사고로 인기절정의 순간에 생을 마감한 가르델은 땅고의 역사만큼이나 기구한 운명을 가지고 태어났다. 가수에서 영화배우로 시쳇말로 만능 연예인이었던 그는 9백곡이 넘는 주옥 같은 땅고 곡을 남겼다.
  
  그러나 그는 태생부터 의혹투성이다. 공식적인 자료에는 그가 1890년 프랑스 뚤루에서 태어났다고 알려져 있으나 그는 어디서 태어났고 그 부모가 누구인지가 알려지지 않아 가르델의 과거는 세인들의 화젯거리였고 그가 죽은 지 6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출생에 대한 비밀은 터부시 돼 왔었다.
  
  또한 카를로스 가르델의 출생에 대한 비밀은 반세기 이상 동안이나 아르헨티나와 우루과이 양국의 논쟁거리가 됐었다.
  


우루과이 정부는 매년 6월 24일을 '가르델의 날'로 정해 기념을 하기도 한다. 가르델은 잘 생긴 미남에다 벨벳 같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지난 30년대 전 세계 여성들의 가슴을 설레게 했다.
  
  그러나 그는 1894년 우루과이 몬테비데오 항에서 부에노스아이레스로 건너와 사창가를 전전하면서 포주 노릇을 하다 체포돼 아르헨티나 최남단의 우수아이아 감옥에서 3년 동안 수형생활을 하는 등 비참한 청년기를 보냈다.
  
  그의 가수 활동은 1910년으로 기록돼 있으나 가수로서 별로 빛을 보지 못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러다 1918년 레코드 취입이 시작되면서부터 세인의 관심을 끌기 시작했다. 그의 출생은 철저하게 베일에 가려졌었고 그를 아는 친구들은 그가 몬테비데오 항의 프랑스 출신 거리의 여인과 이름도 모르는 선원 사이에 태어나 버려진 후 한 직업여성의 품에서 유년기를 보내다 4살 때 부에노스아이레스로 건너갔다고 증언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가르델은 자신의 유언장에서 자신은 프랑스 툴루에서 1890년 12월 11일에 태어났다고 밝혔다. 아무래도 아버지가 누군지도 모르는 자신의 과거를 숨기고 싶었을 것이다. 부에노스아이레스 가르델 연구센터는 최근 가르델의 출생 비밀을 밝혀달라고 아르헨티나 법원에 유전자 감식을 의뢰했으나 법원은 이를 밝히기를 거부하고 가르델의 유언장을 인용, 가르델의 출생지는 프랑스라고 판결했다.
  
  우루과이 정부는 가르델의 출생지가 몬테비데오 인근 타콰람보로 등록돼 있는 점을 들어 가르델의 출생지는 우루과이라고 주장하고 있으나 가르델의 출생에 대한 비밀 역시 보까 항에서 사라진 흑인노예들의 슬픈 과거처럼 탱고의 역사와 함께 영원한 미스터리로 남아있을 전망이다.
  
  할리우드 쇼로 변한 탱고
  
  까를로스 가르델을 통해 세계에 알려진 땅고가 오늘날처럼 세계적인 붐 조성을 하게 된 데는 땅고의 아버지로 불리는 오스발도 뿌글리에세(1895~1995)라는 불세출의 음악가덕분이라는 데는 현지 땅게로(탱고 전문인들)들도 고개를 끄덕인다.
  
  까를로스 가르델의 땅고 음악이 서민들의 한과 애환, 패배자들의 독백, 무능력자들의 신세타령, 부랑아들의 염세적인 점을 부각해 음악자체가 칙칙하고 애조를 띤 것에 비해 뿌글리에세의 땅고는 경쾌하고 밝은 멜로디로 변화를 시킨 게 특징이다.
  
  바이롤린 연주자였던 형들의 영향을 받아 어려서부터 땅고에 깊이 빠져든 뿌글리에세는 15세에 피아노 연주자로 이름을 날리기 시작했다. 1927년 당시 유명했던 로베르또 피르뽀 탱고오케스트라 피아니스트가 된 뿌글리에세는 거기에서 탱고음악인들과 새로운 교류를 하면서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부에노스 현지 탱고음악인들 가운데 주목을 받기 시작하던 그는 1936년 땅고 음악인 노조를 설립하기도 했다. 바로 이 점 때문에 뿌글리에세는 공산주의자로 낙인이 찍혀 상당기간 동안 연주활동에 제약을 받기도 했지만 이 기간 동안 Recuerdo, La Beba, Recien, Barrio,Una ves 같은 땅고 곡으로는 불후의 명작을 작곡하기도 했다.
  
  100세에 가까운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오케스트라를 이끌고 피아노연주에 혼신의 열정을 다했던 뿌글리에세는 항상 자신의 피아노 위에 빨간 장미 한 송이를 올려놓아 자신의 트레이드 마크로 삼기도 했다.
  
  작곡가, 지휘자, 피아니스트로 이름을 날린 뿌글리에세는 지난 1995년 7월 25일 100세를 5개월 남겨놓고 조용히 자신의 딸인 베바의 품에 안겨 세상을 하직했다.그의 인기는 그 다음날 치러진 장례식장에서 느낄 수 있었다. 그의 운구차량을 따라가는 차량의 행렬은 국가 원수 급이었고 시내의 거의 모든 택시운전사들은 마지막 가는 이 탱고영웅을 위해 길게 경적을 울리며 추모의 정을 함께 나누기도 했다. 당시의 한 택시운전사는 무슨 일이냐고 묻는 필자에게 “가르델 이후 최고의 땅게로가 세상을 떠났다”고 대답을 해 그의 인기를 대변해주었다.



뿌글리에세에 의해 현대화로 변한 땅고는 관광상품화 되면서 다시금 변화를 거듭하고 있다. 땅고의 전통을 고집하는 오메로 만시 땅고 하우스에서 만난 노년의 한 땅게로는 “지금 아르헨티나 땅고는 관광상품화 되는 데만 혈안이 되어 점점 할리우드 쇼 화되어 간다. 땅고의 기본인 혼과 열정은 없어지고 점점 대형화 돼가면서 기교만 늘어간다.”며 한숨을 쉬기도 했다.



   김영길의 '남미 리포트' [54] 브라질-아르헨, 서로 ‘네 탓이야’

2006/07/01

   김영길의 '남미 리포트' [51] 탱고의 역사를 찾아서 (상)

2006/07/01

Copyright 1999-2018 Zeroboard / skin by WS